식물이름으로도 남은 제노비아(Zenobia) 여제
식물명 : 제노비아(Zenobia)
학명/영명 : Zenobia pulverulenta (Bartram ex Willd.) Pollard (영) honeycup, dusty zenobia (이명) 제노비아 풀베룰렌타
처음 등록(1799년)시 속명은 애기석남속(Andromeda)으로 학명이 Andromeda pulverulenta W.Bartram ex Willd.이었으나 1895년 Charles Louis Pollard에 의해 Zenobia속으로 분리되어 현재의 학명 Zenobia pulverulenta (W.Bartram ex Willd.) Pollard 가 되었다.속명 Zenobia는 서기 3세기경 Palmyra(현재 시리아지역)왕국의 여왕이자 여황제 Zenobia에서 영감을 받아 정하였다.
[계통]
과 : 진달래과(Ericaceae)
아과 : 산앵도나무아과(Vaccinioideae)
족 : 애기석남족(Andromedeae)
속 : 제노비아속(Zenobia)
(현재 1속 1종이다.)
제노비아(Zenobia)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고대의 여걸로 유명한 인사이다. AD 3세기, 본래 배스 자바이로 알려진 제노비아 여왕(여제)은 현대 시리아의 지역인 팔미라의 탁월한 통치자였다. 그녀의 일생 동안, 제노비아는 '전사 여왕(warrior queen)'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팔미라를 이라크에서 터키로 확장하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로마의 지배에도 도전했다. 비록 그녀는 결국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게 패배했지만, 팔미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용감한 전사 여왕으로서의 그녀는 현대(현재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추앙받고있다.
[탄생과 성장]
제노비아의 탄생에 대해 많은 전설이 제기되었지만, 그녀는 카르타고의 디도 왕비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통상 클레오파트라)가 조상이라는 설이 있으며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 같다. 그녀는 라틴어, 그리스어, 시리아어, 이집트어를 배우면서 헬레니즘 교육을 받았다. 승마, 사냥을 취미로 삼았다고 한다. 그녀는 용감하고 매혹적인 외모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팔미라 전역의 남성들을 사로잡은 특출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결혼과 황후로 등극]
제노비아는 14세 시절이던 255년경에 팔미라의 영주였던 오데나투스의 2번째 아내가 되었으며 3명의 아들(바발라투스, 하이란 2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을 두었다. 오데나투스는 팔미라를 침공하던 사산 제국 군대를 격파하면서 로마 제국 군대의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60년에는 로마 제국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제국과의 에데사 전투 도중에 샤푸르 1세 황제가 이끌던 페르시아 군대의 포로로 잡혀나가면서 갈리에누스가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제노비아는 팔미라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오데나투스는 페르시아인들을 팔미라(시리아)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낙타가 운반하는 물건(비단과 향신료 등)에 25%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팔미라가 부와 번영의 붐을 일으키게 했다. 그것은 '사막의 진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황제로 통치 및 영토 확장]
267년에는 팔미라 제국의 오데나투스 황제가 아들인 하이란 1세와 함께 조카 메오니우스에 의해 암살당한다. 제노비아는 자신의 아들인 바발라투스를 오데나투스의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팔미라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이탈리아, 발칸반도에서 게르만족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고 트라키아에서 고트인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서 270년에 팔미라 제국이 독립 국가임을 선언했고 사산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팔미라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다. 제노비아는 자신을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여왕에 버금가는 "이집트의 여왕", "전사 여왕"임을 자처했다. 자브다스 장군이 이끄는 팔미라 제국 군대는 270년에 이집트(아이깁투스), 시리아(시리아 속주)를 정복했으며 270년 10월에는 이집트 총독을 제거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271년 중반에는 아나톨리아(아시아 속주), 팔레스타인(아라비아 페트라에아)을 정복하면서 팔미라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의 여제(Augusta, 아우구스타)임을 자처하며 바발라토스(아우구스투스), 제노비아(아우구스타)의 이름으로 새로운 주화 사트라드를 발행했다.
[멸망]
270년에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가 이끌던 팔미라 제국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272년에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한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 군대는 안티오케이아(현재의 터키 안타키아), 에메사(현재의 시리아 홈스)에서 팔미라 제국 군대를 연달아 격파했고 팔미라 제국의 수도인 팔미라를 포위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바발라투스를 비롯한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팔미라를 탈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로마 제국은 273년에 팔미라 제국을 정복하게 된다.
제노비아는 274년에 로마에서 열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개선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혔지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제노비아는 로마 제국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을 역임했던 귀족과 결혼한 다음에 티부르(현재의 이탈리아 티볼리)에 위치한 빌라 아드리아나에서 자녀들과 함께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시리아민족의 영웅이되다]
제노비아는 다른 민족, 언어, 종교의 제국을 통치했고, 폭넓은 지지를 받는 팔미라의 군주, 여황제로의 강인한 이미지를 남겼다. 그녀는 교육을 우선시하고 모든 종교의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유명했다.그녀의 죽음 이후 그녀는 클레오파트라와 부디카 같은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야심차고 용기 있는 롤모델로 환영 받았다. 심지어 캐서린 대왕도 군사력이 있고 지적인 이미지의 여자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신을 제노비아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날 시리아에서는 제노비아를 시리아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시리아 국민들이 갖고 있는 애국심의 상징, 폭정에 맞서 싸운 지배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특히 19세기에는 서양에서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지식인들이 제노비아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시리아의 관점에서 제노비아는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졌다.